HWP문서붙임4. 2021년 제2회 국립박물관 대표 유물 설명자료(중앙, 대구박물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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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회 국립박물관상품 정기공모 대표유물 목록

구분

번호

유 물 명

소장품번호

비고

국립중앙박물관

1

금동반가사유상

본관 2789

국보 제78호

2

금동반가사유상

덕수 3312

국보 제83호

3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본관 1958

국보 제81호

4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

본관 1959

국보 제82호

5

개성경천사지십층석탑

본관 6753

국보 제86호

6

고달사지쌍사자석등

신수 18239

보물 제282호

7

부석사괘불

K 969

8

노영 필 묵칠목판 금니아미타구존도 및 태조배첩도

본관12360

보물 제1887호

9

금동불감판

구 1031

10

감로탱화(김로도)

신수 13521

11

산신도

신수 15313

12

칠성도(치성광여래도)

구 8604

국립대구박물관

1

필자미상회혼례도(회혼례첩)

혼인 60주년 기념 잔치

덕수6375

2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

경산 4523

3

고리자루큰칼

본관 11136

4

금동관

신수 610

5

금귀걸이

본관 11124

6

은허리띠 꾸미개

임당 14132, 14133,

14135, 14137,14141~42

7

금동신발

신수 625

8

관음보살

신수 3298

9

관음보살

신수 3299

10

부처

신수 3297

11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

신수 331

12

금동용머리장식

경주 1968

13

현풍곽씨편지

증 14

14

대구 23469

15

떨잠

대구 23463

16

비녀

대구 23461, 23462

17

조복

남산 1473

18

돌띠

증 1209 1210

19

보상화무늬 금직물

신수 1368

20

흥선대원군 기린흉배

신수 6327

번호

국립중앙박물관-1

유물명

반가사유상

국적

/시대

삼국시대

소장품번호

본관 2789

(국보 78호)

크기

높이 80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오른 발을 왼쪽 다리 위에 올린 반가 자세와 오른 손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사유상이 결합된 작품이다. 남아 있는 불교미술품 중 반가사유상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우리나라만큼 반가사유상이 인기를 끌었던 곳이 없었다. 심지어 한 불당의 본존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을 함축한 반가사유상의 신체 표현과 극도로 평온한 표정이 대비를 이루는 조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천의 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며 몸을 감싸고 있다. 이 상은 1미터에 가까운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몸체의 두께가 3~8밀리미터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주조 기술을 보인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2

유물명

반가사유상

국적

/시대

삼국시대

소장품번호

덕수 3312

(국보 83호)

크기

높이 90.9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는 삼산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으로 불리는 낮은 관을 쓰고 있으며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했다. 다리를 감싸며 대좌를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가는 눈매와 양 눈썹에서 콧마루로 내려진 선의 흐름이 시원하고 날카로우며 양 입가엔 고졸한 미소가 어려 있다. 전체적으로 상 전체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였고 신체의 간결한 곡선과 입체감을 강조한 반면 다리와 대좌를 감싼 군의裙衣의 곡선은 유려하다. 국보83호 반가사유상은 일정한 얇은 두께로 제작되어 뛰어난 주조 기술을 보여주며, 특히 일본 코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여 삼국과 고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잘 알려져 있다. 간결하게 신체를 표현하면서도 옷주름이 들고나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현한 조형미와 약 1400년 전, 이 정도 크기의 반가사유상을 주조할 수 있었던 기술력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당시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각사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3

유물명

감산사 미륵보살 입상

국적

/시대

통일신라 719년

소장품번호

본관 1958

(국보 제81호)

크기

높이 254.cm

재질

화강암

상세

정보

통일신라 719년에 김지성이란 사람이 만든 상이다. 상을 제작한 사람과 조성 목적, 제작 연대의 기록을 지니고 있는 중요한 사례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의 신체는 탄탄한 양감으로 가득 차 있다.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으며, 실재감이 넘친다. 이러한 신체 표현은 굽타시대 인도 조각의 영향을 받은 중국 당 조각 양식을 수용하여 자기화 시킨 8세기 초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불상의료로 단단한 화강암을 즐겨 사용하였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양감이 풍부하며 이국적인 화려한 장신구가 특징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목에는 2중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가슴과 팔에 걸친 천의(天衣)는 아래로 늘어져 있다. 팔에 찬 장신구나 치마[裙衣(군의)]에 걸친 구슬띠의 섬세한 표현 역시 눈에 띈다. 이러한 미륵보살상의 장신구와 천의 형태, 착의법, 자세 등은 중국 서안(西安) 보경사(寶慶寺) 전래 당대(唐代) 십일면관음보살상과 일본 호류지(隆寺)의 십일면관음보살상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4

유물명

감산사 아미타여래 입상

국적

/시대

통일신라 719년~720

소장품번호

본관 1959

(국보 제82호)

크기

높이 271.5cm

재질

화강암

상세

정보

아미타불상은 양 어깨에서 발목까지 흘러내린 법의(法衣)가 부처의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난다. 반복적인 물결 모양의 대칭적인 U자형 옷주름은 불상의 부피감과 표면의 높고 낮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일한 형식의 불상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砂巖製) 불입상, 굴불사지 남면 불입상과 여러 금동불입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원류는 인도 굽타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은 당대(唐代)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했던 구법승(求法僧)들이 귀국할 때 인도의 불상도 함께 전래하면서 비슷한 유형의 불상이 중국에서도 모각되었고, 이러한 형식이 다시 통일신라 불교 조각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감산사 아미타불상은 8세기 중반의 불상처럼 적극적으로 입체감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풍만한 양감과 역동적인 사실감을 강조하던 새로운 흐름을 인지하고 그 형식을 수용하여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5

유물명

경천사 10충석탑

국적

/시대

고려 1348년

소장품번호

본관 6753

(국보 제86호)

크기

높이 1350cm

재질

대리석

상세

정보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탑으로, 고려의 전통과 당시 원(元)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융합하여 만들었다. 목조 건축 장식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탑 아래쪽 3단의 기단부에는 당나라 현장법사와 손오공 등이 인도에서 경전을 구해오는 험난한 여정을 중심으로 나한과 사자를 새겼다. 그 위 탑신에는 16장면의 법회(會)와 법회 이름을 새긴 현판을 달았다(1~4층). 탑 꼭대기까지는 다섯 부처 또는 세 부처를 조각하였다(5~10층). 1층 탑신에는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면서 온 백성이 편안하고 일체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내용과, 진령부원군 강융(姜融)과 원사(院使) 고용봉(高龍鳳 또는 高龍普)이 시주하여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새겼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田中光顯가 일본으로 무단반출 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언론인 E. 베델과 헐버트의 노력, 우리 국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18년 환수되었다.

경천사 석탑은 나무로 만든 건축물처럼 재현되어 있으며 층마다 불상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탑의 아래층 평면은 사면이 돌출되어 있어 원나라에서 유행한 몽골·티베트계 탑과 모양이 비슷한 점이 특징이다. 반면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전통적인 석탑 모양이다. 이 같은 구성은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에 유행한 양식을 참고로 한 고려의 창안이라고 볼 수 있다. 약 120년 뒤에 조선 왕실에서 재질과 모양이 비슷한 석탑을 원각사에 세우기도 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6

유물명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국적

/시대

고려시대

소장품번호

신수 18239

(보물 제282호)

크기

높이 305cm

재질

화강암

상세

정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터에 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나타난 독특한 석등 양식으로 법주사 쌍사자 석등, 중흥사터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등의 예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은 팔각기둥 형태의 간주석(竿柱石)을 대신하여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선 자세를 취하는 매우 역동적인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석등의 하대석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자 2마리가 나란하게 앉아있어 안정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또한 직사각형의 평면구조에 맞춰 전체적인 조형이 이루어진 점 또한 특징적이다.

고달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된 선종 사찰의 하나로 이후 법안종(法安宗) 및 천태종(天台宗)의 영향을 받으며 몇 차례의 중건을 거듭하다 17세기를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터는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부도(국보 제4호), 석불대좌(보물 제8호),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원종대사혜진탑비(보물 제6호) 등의 조형미가 뛰어난 우수한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7

유물명

부석사 괘불

국적

/시대

조선 1684년

소장품번호

K969

크기

922cm X 578cm

재질

비단에 색

상세

정보

괘불掛佛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법회나 불교 의식을 야외에서 거행할 때 걸어 두는 대형 불화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부모와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천도薦度 의식을 빈번하게 행했다. 불교의 재의식인 예수재豫修齋나 수륙재水陸齋에 괘불을 걸어 망자亡者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인도했다. 영산재靈山齋, 관음재音齋 같은 다양한 불교 의식에도 괘불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야외 불교 의식에서 괘불의 의미와 역할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한국 불교 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약 300여 년 전인 1684년(숙종 10) 부석사에서는 9미터가 넘는 비단에 큰 그림을 그려졌다.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위로 세 부처와 권속眷屬을 추가하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부처와 불법佛法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부처가 깨달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한다. 비로자나불 오른쪽은 질병 고통이 없는 유리광정토를 다스리는 약사불의 설법 장면이고, 왼쪽은 아미타불의 설법 장면이다. 여러 부처를 한 화면에 표현했지만, 석가모니불 상단에 그려진 비로자나불의 구도는 조선시대 불신관에서 비추어봤을 때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이 동일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부석사 괘불>에는 보살과 천인天人, 신들의 무리까지 6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 신앙과 교리가 한 화면에 펼쳐져 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8

유물명

노영 필 아미타여래구존도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

국적

/시대

고려 1307년

소장품번호

본관12360

(보물 제1887호)

크기

22.5cm x 13cm

재질

흑칠 목판 위에 금

상세

정보

세로 22.5cm, 가로 13cm, 두께 1cm의 목판에 옻칠을 하고 금선묘로 앞면에 아미타팔대보살도, 뒷면에 금강산 담무갈보살과 지장보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다. 어딘가에 꽂아두고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며 하단 가장자리에 2개의 촉이 남아 있다. 촉과 촉 사이 공간에 '大悳十一年丁未八月日 謹畵魯英同ㅁ'이라는 발원 명문이 있어 이 불화가 충렬왕 33년인 1307년 8월에 노영魯英이라는 화사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가장 이른 예다.

앞면에 그려진 아미타팔대보살도의 불보살은 모두 측면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갸름하게 묘사되었다. 다른 아미타팔대보살도에 비해 큰 지물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앞줄 중앙 좌측의 보살은 왼손에 발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다. 고려시대 아미타팔대보살도 중에서 관음보살의 도상으로 정병 대신 이러한 지물이 채택된 것은 이 작품과 도쿄예술대학 소장본뿐으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뒷면은 크게 상하로 화면이 구분되는데 <<동국여지승람>> 회양정양사조淮陽正陽寺條, <<유점사사적기楡岾寺事蹟記>> <말사표훈사지末寺表訓寺誌> 연혁沿革 편의 기사로 보아 상부의 그림은 고려 태조가 금강산 정양사에 오르던 도중 배점拜岾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고려에 의한 완전한 통일을 기원하자 담무갈 보살이 그의 권속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는 내용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화면 왼쪽 중간 부분에는 엎드려 예경의 자세를 취한 인물 앞에 태조[大祖]라는 부기가 보인다. 하부의 중심인물은 원형보주를 들고 민머리의 형상을 한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을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지장보살의 왼쪽과 오른쪽 하단에서 참례하고 있는 자세의 인물들 옆에는 각각 화사인 노영의 이름과 ㅁㅁ(祿始?)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노영은 무신정권기 최우崔瑀의 원찰이었던 강화도 선원사禪源의 벽화를 그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화면의 테두리를 금강저 문양으로 장식하는 것, 빈 공간을 구름 문양으로 가득 채우는 것, 사경변상도에 등장하는 금강역사의 무기를 연상시키는 유난히 큰 금강저 지물 등 사경변상도와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으로 노영이 벽화뿐만 아니라 사경변상도나 예배용 불화까지도 넘나드는 뛰어난 기술을 구사한 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9

유물명

금동불감판

국적

/시대

조선

소장품번호

구 1031

크기

15.2cm x 19.5cm

10.5cm x 19.1cm

9.9cm x 19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작은 법당法堂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선시대 불감佛龕의 편이다. 나무 판은 없어졌고 지금은 그 위에 올려 세웠던 세 개의 금동제 판만 남아 있다. 불교의 도상들을 타출 기법으로 도드라지게 부조하였다, 사천왕이 수호하는 작은 문 너머로 부처가 자리한 찬란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연화좌 위에 앉은 부처와 주변의 권속들은 금빛로 빛나며 예배자가 향후 도달하게 될 부처의 세계를 보여 준다. 비파, 검, 용과 보주, 보탑을 든 사천왕은 예배자의 심금을 울리는 금빛 세계를 지키고 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10

유물명

감로탱화(감로도)

국적

/시대

조선

소장품번호

신수 13521

크기

193cm x 200.7cm

재질

비단에 색

상세

정보

감로도는 중생들에게 감로甘露 즉 이슬과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시키는 의식의 모습을 그린 불화다. 우란분경蘭盆經에서는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방법을 묻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감로도는 억울하게 죽은 모든 영혼이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아 다음 생에서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목적에 의해서 많이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감로도에 등장하는 음식이 차려진 제단과 법회장면이 이 그림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그림 아래 부분에 전생의 업을 표현한 고통 받는 중생의 모습을 더욱 확대해서 묘사했다. 중생들이 받는 고통은 중앙에 커다랗게 등장시킨 아귀상에 집약하여 나타냈는데, 위쪽에 표현된 부처들은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신속히 내려오는 듯 한 속도감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11

유물명

산신도

국적

/시대

조선

소장품번호

신수 15313

크기

81cm x 109.5cm

재질

비단에 색

상세

정보

산신도는 토착적인 산신 신앙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사찰 내에 모셔지게 되었다. 본래 불교에서도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중神衆 가운데 하나로서 주산신主山神이 있으나, 대부분의 산신도는 민간신앙적인 산신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반영한다. 이 산신도 역시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신령한 분위기의 노인이 산의 영물인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전형적인 민간 신앙 속 산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신은 깊은 산 속에서 소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 있으며, 배경이 단순화되고 산신은 크게 그려져 부각되었다. 산신 곁에는 시중드는 동자가 있고, 산신이 거느린 호랑이는 민화풍으로 그려졌다.

번호

국립중앙박물관-12

유물명

칠성도(칠성탱, 치성광여래도)

국적

/시대

일제강점기

소장품번호

구 8604

크기

142.0cm x 116.8cm

재질

비단에 색

상세

정보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붉은 해와 달은 든 일광보상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서 있다. 주변에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자리해 있다. 머리가 높게 솟아오른 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며 남극성을 상징하는 수노인壽老人이다.

개항 이후 천주교나 기독교와 경쟁해야 했던 불교계는 대중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세속적인 바람과 관련이 깊은 칠성도 제작도 활발해졌다. 이 그림은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에 조성되었으며, 안타깝게도 화기畵記의 반이 잘려나가서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전 시기 불화와 달리 부처와 보살의 옷 끝단에 그려진 금색 꽃문양이 돋보인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

유물명

필자미상회혼례도

(회혼례첩)혼인60주년 기념잔치

국적

/시대

한국/조선

소장품번호

덕수 6375

크기

37.9cm × 24.8cm

재질

사직-견

상세

정보

조선시대 회혼례 장면을 그린 화첩이다. 회혼례는 결혼한 지 60년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를 치르는 행사로, 태어난 지 60년이 되는 회갑回甲, 과거에 등재한 지 6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회방回榜과 함께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 회혼례첩은 전안례奠雁禮부터 합근례合巹禮까지의 의식과 혼례 의식이 끝난 후 잔치를 벌여 자식과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는 장면까지 모두 다섯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구도는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묘사하여 공간감을 극대화하였다. 인물과 건물, 여러 가지 기물 등을 섬세한 필치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풍습과 풍물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2

유물명

호랑이 모양 허리띠고리 虎形帶鉤

Tiger-Shaped Buckle

국적

/시대

한국/원삼국

소장품번호

경산 4523

크기

10.2cm

재질

청동

상세

정보

경산 신대리유적 1호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된 이 허리띠고리는 일부 파손되거나 부식된 부분이 있지만 거의 완형에 가깝다. 허리 중앙부가 파손되어 좌·우로 분리된 것을 다시 부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허리띠고리는 호랑이가 앉아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얼굴과 잘록한 허리 등 전체적인 모습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꼬리는 엉덩이에 붙어 몸체와 일체형을 이루며, 뱀처럼 둥글게 말려있다. 엉덩이는 등과 허리에 비해 낮고 긴 편이며 다소 둥글게 처리하였다. 다리는 구부린 상태로 앞발이 뒷발에 비해 조금 더 길다. 앞·뒷발에는 선무늬를 이용해 발톱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의 입 주변은 여러 개의 새김무늬[沈線文]와 가로줄무늬 [橫線文]가 서로 교차되게 새겨져 있으며, 요철무늬[凹凸文]를 이용하여 14개의 이빨을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눈은 동심원을 2겹 가량 겹쳐서 나타냈고, 목과 배의 잘록한 부분에는 2줄의 구획선 안에 가로줄과 세로줄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무늬를 새겼다. 길게 만들어진 구부鉤部의 끝은 갈고리 모양으로 처리하였으며, 4줄의 세로선 이 3군데에 표현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번데기 모양의 돌기를 장식하였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3

유물명

고리자루큰칼 環頭大刀

Sword with Ring Pommel

국적

/시대

한국/삼국(신라)

소장품번호

본관 11136

크기

68.6cm

재질

본관 11136

상세

정보

삼국시대 무덤의 대표적 껴묻거리[副葬品]로는 고리자루큰칼이 있다. 고리자루큰칼은 무덤 주인공의 허리 부분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용품도 있지만 대부분 장식품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구 달성고 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이다.

이 고리자루큰칼은 세잎무늬[三葉文]가 장식된 고리만 금동이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고 표면에만 금동판을 덧대었다. 둥근 고리 안에는 세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칼집에는 새끼칼 2자루가 장식되어 있다. 새끼칼의 표면에 다시 간략화 된 새끼칼 2자루가 표현되어 있다.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생긴 칼집의 끝부분에는 연속으로 작은 점을 찍어서 무늬를 새겼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4

유물명

금동관 金銅冠 Gilt-Bronze Crown

국적

/시대

한국/삼국(신라)

소장품번호

신수 610

크기

39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1960년 국립박물관이 탑리 고분군의 서쪽 정상부에 있는 가장 큰 고분을 발굴조사 하였다. 하나의 봉토 안에서 모두 5개의 덧널이 확인되었다. 이 금동관은 그 가운데 제1곽에서 출토되었다. 넓은 관테[帶輪]에 3개의 세움장식[立飾]을 금동못으로 고정시켜 부착한 점이 특징이다.

3개의 세움장식 가운데 전면의 세움장식은 똑바로 서있지만, 양 측면의 세움장식은 뒤쪽으로 조금 휘어진 형태로 만들었다. 세움장식은 가장자리를 얇게 오려낸 다음 일일이 꼬아서 새의 깃털모양처럼 만들었다. 세움장식의 상부에는 마치 새의 눈을 연상시키는 2개의 구멍을 내었다.

세움장식의 가장자리를 새 깃털모양처럼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관에서 많이 나타나는 제작기법이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 서 출토된 은관과 대구 달성고분군 37호분 제2곽에서 출토된 고깔 모양의 관[帽冠]에도 새 깃털 모양의 세움장식이 있어서 고구려 문화가 신라로 유입되었음을 알려준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5

유물명

금귀걸이 金製耳飾 Gold Earrings

국적

/시대

한국/삼국(신라)

소장품번호

본관 11124

크기

7.5cm

재질

상세

정보

대구 달성고분군 55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중심고리[主環]와 노는고리[遊環], 중 간식中間飾, 드림[垂下飾]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간식이 특히 화려하다. 중심고리의 속은 비어 있다. 중간식은 작은 고리를 여러 개 연접하여 만든 구체와 반구 체가 상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중간에는 둥근 고리를 끼워 넣었다. 상하의 작은 고리 가운데에는 새김눈[刻目帶]가 있는 고리가 있는데, 여기에 금실을 꼬아 달 [瓔珞]를 장식하였다. 반구체에도 달개가 달려 있어서 화려함을 더한다. 드림은 심엽형心葉形이며, 연결금구가 걸리는 부분에는 구멍을 뚫었다. 드림의 가장자리 와 앞·뒷면 가운데에 새김눈테가 있는 금띠를 붙였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6

유물명

은허리띠 꾸미개 銀製銙帶

Silver Belt Ornaments

국적

/시대

한국/삼국(신라)

소장품번호

임당 14132, 14133, 14135, 14137, 14141~42

크기

124.8cm

재질

상세

정보

은허리띠는 띠고리와 띠꾸미개, 드리개[腰佩], 띠끝장식[帶端金具]으로 이루어져 있다. 띠꾸미개는 맞새김 기법으로 인동무늬[忍冬紋]가 간략하게 표현된 사각형 판 에 심엽형心葉形의 장식이 달려있다. 사각형판을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에 매달아 장식한다.

사회적 위계에 따라 각기 다른 재질의 허리띠를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금·은을 비롯해 금동과 철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만들었다.

매달린 장식에는 숫돌, 족집게, 손칼, 물고기모양 장식, 곱은 옥 등 다양한 상징적 기물들이 있다. 특히 물고기모양 장식을 들여다보면 가는 선으로 물고기 무늬가 그 려져 있다. 물고기 자체의 상징적 의미는 다 산多産으로 그 의미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물고기 안에 2마리의 물고기를 새겨 넣었을 수도 있다. 혹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처럼 새끼를 가졌거나 새끼를 배 밑에 데리고 다니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7

유물명

금동신발 金銅飾履 Gilt-Bronze Shoes

국적

/시대

한국/삼국(신라)

소장품번호

신수 625

크기

33.8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1960년 국립박물관이 탑리 고분군의 서쪽 정상부에 있는 가장 큰 고분을 발굴조사 하였는데, 하나의 봉토 안에서 모두 5개의 나무덧널[木槨]이 확인되었다. 이 금동신발은 그 가운데 제2곽에서 출토되었다. 3매의 금동판을 맞대어 만들었고 뒷판과 바닥판은 못으로 고정하였다. 신발 앞판에는 무늬를 세로로 연 속해서 맞새김장식하였다. 무늬와 ‘ ’무늬가 번갈아가면서 새겨져 있다. 바 닥에는 둥근 달개[瓔珞]를 매달아 장식적 요소를 더하였다. 다른 금동신발과 달 리 신발 뒷축이 각이 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형태와 맞새김장식의 무 늬 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신라식 신발에 해당한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8

유물명

관음보살 金銅觀音菩薩立像 Avalokitesvara Bodhisattva

국적

/시대

한국/신라 7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3298

크기

33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국보 제183호 금동관음보살상은 장신구, 천의, 영락장식 등을 전면에 걸쳐 섬세하게 조각하였으나, 국보 제184호 관음보살상에 비해 입체감은 떨어진다. 온화한 표정의 얼굴에 늘씬하고 유연한 몸매, 신체에 밀착된 법의 표현 등에서 관능적인 여성미가 느껴지는 듯하다.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틀어 전체적으로 우아한 삼곡 자세를 보인다. 목걸이와 X자로 교차된 영락장식, 양팔을 감싸고 대좌까지 내려오는 천의가 율동감과 함께 세련미를 더해준다. 전체적인 자태와 조각 양식이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보살상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 7세기대에 제작된 백제 보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976년 3월 8일 봉한동에서 공사 중 3구의 불보살상이 자갈밭에서 발견되었다. 그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봉한동으로부터 2.5km 떨어진 대밭골에서 이 3구의 불상을 70년 전 어떤 사람이 주웠는데 집안에 병이 생겼다. 무당이 이를 보고 새로 들어온 물건이 없는지 물었고 주인은 그 3구의 불보살상을 지목하여 이 상들을 봉한동에 묻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러나 대밭골에 삼국시대 말기부터 있던 접성사接聖의 불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관음觀音 Avalokitesvara말 그대로 고통에 처한 중생의 목소리를 듣고 그 근기(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교화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 대상)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보살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을 옆에서 도와주는 보살로 등장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따르면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서 있는 아미타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살상의 관에 작은 불상[化佛] 이 묘사된 경우 관음보살로 보곤 한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9

유물명

관음보살 金銅觀音菩薩立像 Avalokitesvara Bodhisattva

국적

/시대

한국/신라 7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3299

크기

34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국보 184호 금동관음보살상은 광배와 대좌는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남성적인 풍모, 전면全面에 걸처져 있는 화려한 천의와 영락장식, 신체와 분리한 조각 등을 볼 때 우리나라 금동불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타원형의 꽃장식이 있는 보관 중앙에 좌상坐像의 화불化佛이 있다. 머리카락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의 입체감이 돋보이는 앞면과 달리, 뒷면은 입체감은 덜하나 각 부분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영락을 살짝 쥐었다.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정병을 들고 있었던 듯 하나 결실되어 알 수 없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0

유물명

부처 金銅佛立像 Buddha

국적

/시대

한국/통일신라 8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3297

크기

40.3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국보 제182호 금동불입상은 통일신라시대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가 큼직하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고 양감이 돋보인다. 두 눈은 지그시 감아 명상에 잠긴 듯하다. 두 손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였다.

통견의 대의는 U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일정하게 내려오다가 양 다리에서 나누어져 무릎 아래까지 이어진다. 대좌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발아래에 대좌에 꽂아 연결하였던 촉이 남아있다. 뒷면은 도금이 되어 있으나 세부를 조각하지 않았다. 주조 시 내부에 채워져 있던 흙을 빼내기 위한 구멍이 머리··무릎의 세 부분에 뚫려 있다. 신체에 비해 작은 손, 몸에 밀착시킨 대의, 옷주름 표현, 속이 완전히 비게 만든 중공식中空式 주조기법 등으로 볼 때 불상 제작 시기는 8세기 초로 추정된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1

유물명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 松林寺 五層塼塔 舍利莊嚴具 Reliquaries

국적

/시대

한국/통일신라 8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331

크기

15.3cm

재질

금동, 유리

상세

정보

1959년 송림사 오층전탑을 해체·수리할 때 2층 탑신의 거북모양 돌상자[石函] 안에서 사리기와 여러 공양물이 나왔다. 화려한 집 모양[殿閣形] 사리기는 금동판을 오려서 만들었다. 네모난 기단 위에 난간을 세우고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워 보개寶蓋를 얹었다. 난간 안쪽 중앙에는 여섯 개의 금동제 꽃잎을 못으로 고정했다. 연꽃 모양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녹색 유리로 만든 잔과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유리잔은 표면에 유리로 만든 고리 모양을 상··하단에 엇갈리게 붙여 장식하였다. 사리병은 잔과 같은 재질에 목이 좁고 길다. 몸체가 둥근 형태로 보주형寶珠形의 뚜껑이 있다. 사리기와 함께 돌상자 안에는 금제동심원륜金製同心圓과 유리구슬, 수정, 곱은옥, 대롱옥, 반지 등이 들어 있었다. 백제의 은제관식銀製冠飾과 유사한 은제도금관식銀製鍍金冠飾이 돌상자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 밖에 고려시대에 전탑을 수리하면서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감청자사리합이 5층 옥개석 윗면에서 발견되었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2

유물명

금동용머리장식 金銅龍形幢竿頭 Dragon Head of a Banner Pole

국적

/시대

한국/통일신라 9세기

소장품번호

경주 1968

크기

68cm

재질

금동

상세

정보

절 입구에서 사찰의 소속을 표시하거나 법회法會 때 거는 깃[]을 매다는 시설인 보당寶幢 끝에 올렸던 용머리장식이다. 용머리장식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보살의 공덕을 찬양하고 경전을 세상에 유포하여 인간 세상에 정법正法을 펼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 안에 물고 있는 커다란 여의주 뒤에 도르래가 있다. 턱 아래에도 구멍을 뚫어 쇠줄을 걸어 깃발을 쉽게 오르내리도록 고안하였다. 입술과 눈 윗부분에는 운기문雲氣文을 새겨 넣었다. 얼굴 주위의 갈기는 바람에 휘날리듯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전면全面에 걸쳐 선새김 기법으로 비늘과 털을 매우 정교하게 채워 넣어 장식미를 더하였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3

유물명

현풍곽씨 편지 [졍냥이는 심(학질)을 말았는가?]

국적

/시대

한국/조선

소장품번호

증1~증168

크기

20.5×22.0cm

재질

상세

정보

곽주郭澍 1569~1617는 곽경郭鏡의 19세손이자 슬하에 4남 5녀의 자녀를 둔 현풍 지역의 세족勢族이다.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종질이기도 하다.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진주 하씨晉州 河氏 1580~1652 이후 추정와 결혼하였으나 전처 아들인 이창以昌과의 갈등으로 곽주는 소례, 하씨는 논공에서 각자 떨어져 살았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왕래하는 생활을 하면서 편지를 통해 많은 사연들을 주고 받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남성들은 가정사에 무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곽주가 하씨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옷감 생산과 염색, 옷의 제작 여부, 자녀들의 외출복 등 집 안팎의 크고 작은 일들을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자녀들에 대한 걱정과 가족에 대한 안부는 아버지로서의 정감을 느끼게 한다.

조선의 선비로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지키려는 모습도 담겨 있다. 편지 내용에는 곽주가 과거 시험을 보러가는 사연이 있지만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김굉필金宏弼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운동과 관련하여 과거를 치지 못하더라도 상소는 꼭 올리고 오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곽주는 가족들의 잔병치레를 걱정하여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 편지는 심(학질)을 앓고 있는 졍냥(곽주의 딸)이가 다 나았는지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졍냥이는 다른 편지에서도 종기를 앓고 있다는 사연이 언급되는 등 몸이 허약하여 곽주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4

유물명

黑笠

국적

/시대

한국/조선

소장품번호

대구 23469

크기

높이 14cm, 지름 30cm

재질

피모 - 말총

상세

정보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의 의관문물 간소화 시책에 따라 갓의 양태가 좁아지고 대나무 갓끈을 사용한 형태의 흑립이다. 흑립은 양반들이 외출 시 착용하던 것으로, 원통형 대우 부분은 말총을 망(網)으로 엮어 만들었다. 양태 부분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망을 엮고 그 위에 말총을 방사상(放射狀)으로 덧씌웠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5

유물명

떨잠 銀製鍍金琺瑯簪 Hairpin

국적

/시대

한국/조선 19세기

소장품번호

대구 23463

크기

9.5cm/13.0cm

재질

은, 옥

상세

정보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의 여인들이 예복을 입고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할 때 머리에 꽂는 장신구이다. 꽃잎 모양을 조각한 옥판에 진주, 산호, 밀화를 꽃 모양으로 부착하였고 칠보七寶로 꽃잎을 장식하였다. 금실로 가늘게 용수철 을 만들고 그 위에 꽃과 나비, 새 등의 모양과 진주를 붙여 움직일 때마다 용수 철 위의 나비, 새 모양의 장식품들이 흔들리도록 했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6

유물명

비녀 Hairpin

국적

/시대

한국/조선19세기후반~20세기전반

소장품번호

대구 23461, 23462

크기

36.5cm/37.5cm

재질

상세

정보

용비녀는 왕실에서 큰 머리 위에 꽂았던 예장용 비녀이다. 봉황비녀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가에서도 혼례 식 때 한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보통의 비녀보다 길이가 매우 길어 댕기를 양 쪽에 감아 앞으로 늘이기도 했다.

밀화비녀는 왕실이나 반가에서 예장용으로 사용했다. 은으로 된 몸체에 밀화로 비녀머리를 장식한 화려한 비녀이다. 밀화 아래 부분에 파란색으로 장식한 나비와 연꽃 봉오리, 넝쿨무늬, 자를 새겨 행복을 기원하였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7

유물명

조복 朝服

Official Ceremonial Attire for men

국적

/시대

한국/20세기 전반

소장품번호

남산 1473

크기

133cm

재질

상세

정보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해 나랏일을 하는 관리가 되면 정해진 대로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관복을 입었다.

조복은 관복 가운데 하나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왕실의 경축일, 나라의 제사, 정월 초하루, 동지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나 명절 때 입는 예복禮服이다. 금관金冠이라 불리는 양관梁冠을 같이 착용했기 때문에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 불리기도 한다. 안쪽에 청초의靑綃衣라고 하 는 청색의 옷을 받침옷으로 입고, 겉에 붉은색의 적초의赤綃衣를 착용한다.

그 외 적초상赤綃裳, 백초중단白綃中單, 청초중단靑綃中單, 폐슬蔽膝, 대대大帶, 혁대革帶, 패옥佩玉, 후수後綬, 襪, 鞋, 과 함께 착용한다. 품계에 따라 관의 양의 수, 후수後綬의 무늬, 환의 재료, 대와 홀의 재료, 패옥의 색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8

유물명

돌띠 Belt for the First Birthday of a Baby

국적

/시대

한국/조선19세기후반~20세기전반

소장품번호

대구1209, 증1210

크기

50.5cm/58.0cm

재질

상세

정보

돌을 맞은 아이의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기원하는 뜻으로 허리에 돌려 매는 허 리띠다. 아기의 복과 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십장생十長生무늬를 수놓아 장식한다. 오곡五穀담긴 주머니를 돌띠에 매달아주기도 한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19

유물명

보상화무늬 금직물 寶相花紋錦

국적

/시대

한국/고려12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1368

크기

13.2×22.6cm

재질

상세

정보

은 염색한 여러 가지 색실을 사용하여 제직한 무늬가 있는 직물이다. 제 직방법에 따라 경금經錦과 위금緯錦로 나눠진다. 경금은 베틀의 경사에 실을 걸 때 일정한 구간에 색을 다르게 하여 건다. 즉, 날실[經絲]에 걸린 실의 색 수에 따 라 직물의 무늬가 표현된다. 날실에 색상이 많아지면 실의 밀도가 높아져서 직 물을 제직하기가 힘든 단점이 있다. 위금은 이러한 경금의 단점을 좀 더 보완하여 발전시킨 제직기법이다. 위금의 제작방법은 경금과 반대로 씨실[緯絲]에 색실을 사용하여 무늬를 만든다. 따라서 위금은 경금보다 훨씬 다양한 색으로 무늬를 만들 수 있다.

봉생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이 금직물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위금기법의 고려시대 직물이다. 자색-황색-녹색, 자색-미색-황색의 3가지 색이 한 조를 이루어 짜여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보상화무늬의 과장된 형태에서 벗어나 단순화된 기하학적 형태가 나타나 있다.

불상이나 탑을 조성할 때 경전이나 발원문, 발원자들의 옷 등을 직물에 싸서 넣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직물은 색상과 그 형태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이 직물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어떤 직물이 유통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직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문화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번호

국립대구박물관-20

유물명

흥선대원군 기린흉배

興宣大院君 麒麟胸背

국적

/시대

한국/조선19세기

소장품번호

신수 6327

크기

25.5cm×23.1cm

재질

단, 견사

상세

정보

흥선대원군이 착용하던 기린흉배이다. 구름무늬 비단 바탕에 금실로 수놓았다. 기린은 봉황, 거북, 용과 함께 영험한 동물의 상징이다. 기린은 상상의 동 물로 얼굴은 용을 닮고 사슴과 유사하며 몸에 비늘이 있다. 인을 존중하고 를 지키는 지혜로운 동물로 인덕의 세상에 출현한다고 인식되어 왔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의 상복에 부착하는 것으로 품계에 따라 무늬를 다르게 한다. 상하계급을 구분해 주기도 하지만, 자수의 섬세함과 다양 한 무늬는 옷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을 보라고 한다.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를 수 놓은 원형의 보를 곤룡포의 가슴, 등, 양어깨, 네 곳에 붙였다. 평상시 입는 단령은 사각형의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다. 조선 초에는 대로써 품계의 차이를 가렸으나, 잘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여 단종 2년(1454)에 흉배의 무늬에 따라 품계와 상하를 구분하도록 했다. 1품은 문관文官 공작孔雀, 무관武官 호표虎豹, 2품은 운안雲雁과 호표虎豹, 3품은 백한白鷳과 웅비熊羆, 대군은 기린, 대사헌大司憲은 해치獬豸, 도통사都統使는 사자獅子, 왕자와 군은 백택白澤이었다. 흉배의 무늬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조선 초기에는 주로 옷감에 직접 직조하는 방식을 썼으나 후기부터는 대부분 자수 흉배가 사용되었다.